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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야산 보원사 텅 빈 충만 나누는 순례자 발길 따라 다시 피는 백제 미소(법보신문 2013-0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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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14-06-26 10:10 조회8,329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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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야산 보원사   텅 빈 충만 나누는 순례자 발길 따라 다시 피는 백제 미소
법보신문












100여 가람 품었던 가야산
백제 최대 ‘불교문화 특구’ 


최고 명당지 찾던 흥선군
사찰 불 태워 부친 묘소로
최대 철불 출토 보원사도
쇠락하여 논밭으로 전락


내포가야산 성역화 불사는
마애불 미소 담는 ‘마음공사’
문화재서 신행 공간으로 변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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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포 가야산 자락에 남아있는 보원사는 국내 최대 규모의 철불이 출토되었을 만큼 웅장한 규모를 자랑하는  대가람이었다. 어느 때, 어떤 이유로 쇠락하고 폐사 됐는지 정확한 기록은 알 수 없다. 

 


서산마애삼존불은 천 년 넘게 웃고 계신다. 그 웃음이 넉넉하여 ‘백제의 미소’라 부른다. 바위는 투박한데 미소는 맑다. 미소는 아침 저녁으로, 또 계절에 따라 다르다. 아침에는 밝은 기운이 서리고, 저녁에는 자비로움이 감돈다. 바위에서 튀어나온 세 부처님, 즉 석가모니불과 호리병을 든 제화갈라보살, 반가사유상의 미륵보살은 1400여 년 전에 우리 곁에 나투셨을 것으로 추정된다.


바위를 쪼아서 부처 형상을 만들기도 어려울 텐데 자비로운 미소를 새겨 넣어야 했으니 초인적인 능력이 필요했을 것이다. 당대 최고의 기량을 지닌 석공이 기도를 올리고 연장을 들었을 것이다. 부처의 웃음에는 속기가 없어야 했으니 자신도 부처를 닮아야 했을 것이다. 마음공부도 치열하게 했을 것이다. 그래서 비록 부처님은 인간이 만들었지만 그 표정만큼은 인간의 것이 아니다.


백제의 미소가 내려와 고인 곳에 보원사가 있었다. 서산시 운산면 용현계곡 초입에 드넓은 보원사의 터가 있다. 보원사는 통일신라시대 화엄십찰 중 하나였다. 고려 광종 때 왕사였던 법인국사 탄문스님도 이곳에서 입적했다. 탄문 스님이 보원사로 떠나던 날, 광종은 태자와 백관을 거느리고 개성의 교외까지 나와 스님의 뒷모습을 지켜보았다고 한다. 지금은 중앙에 5층 석탑을 비롯해 석조(石槽·보물 제102호)와 당간지주(보물 제103호), 법인국사보승탑과 비(碑) 등만 남아있다. 일제강점기에 이곳에서 출토된 국내 최대 고려철불좌상(높이 257cm)과 철조여래좌상(높이 150cm)은 국립중앙박물관에 앉아 계신다.


옛 기록을 더듬어 맞춰보면 보원사의 성주괴공이 짚힌다. 보원사는 일명 강당사(講堂寺)라고도 하는데 백제시대에 창건했다. 본찰인 보원사를 포함 99개 암자로 이뤄진 화엄도량이었고 1000여명의 승려들이 있었다. 장엄했던 사찰은 조선초까지 이어졌다. 그리고 조금씩 기울어져갔다. 1619년(광해군 11)에 편찬된 ‘호산록’에 이런 내용이 보인다.


‘뜰에는 옛 비석이 있는데 송 태조(961~975)때 건립한 것으로 그 높이가 세 길이나 되며 글자는 이끼가 덮여서 읽을 수가 없다. 늙은 회화나무가 있으니 가지가 무성하고 그늘이 아름다우며 이따금씩 구름과 우레 소리가 그 위에서 들리는 것 같다. 절은 오래 되고 중들은 쇠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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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원사의 100번째 암자였던 백암사지. 사라진 암자를 그리워하 듯 멸종위기종인 노랑상사화가 군락을 이루며 피어있다.

 


이후 보원사는 폐사되었다. 언제 어떤 이유로 어떻게 쇠락했는지 알 수 없다. 시나브로 허물어졌는지, 누가 갑자기 불을 질렀는지, 유생들이 훼손했는지…. 이렇게 사라진 절들이 이 땅에 얼마나 많을 것인가. 보원사지 경내는 논밭으로 변했다. 유물들은 여기저기 흩어져 있다. 당간지주와 5층 석탑은 무심하게 하늘을 찌르고, 허공에서 떨어지는 적멸이 쓸쓸하다.


보원사 뿐만 아니라 가야산 일대에는 숱한 절터들이 있다. 가야산은 상왕산, 덕숭산, 연암산을 포함한 금북정맥의 핵심구간이다. 가야산 하면 해인사가 있는 합천의 가야산을 떠올린다. 하지만 충남 가야산이야말로 일찍이 100개가 넘는 절을 품고 있었다. 신라에 남산이 있었다면 백제에는 가야산이 있었다. 백제 불교문화의 특구였다. 가야산에는 남쪽으로 가야사지(현 남연군 묘)와 수덕사, 동쪽으로는 서림사지, 서쪽은 문수사와 개심사, 북쪽으로는 보원사지가 있다. 반경 5키로미터 내에 폐사지가 무려 100개도 넘는다. 실로 부처님 땅이었다. 가야산에 들어 유심히 눈을 주면 온통 불교 유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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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라에 석굴암이 있다면 백제에는 서산마애삼존불이 있다.

 


내포 가야산 일대는 예부터 천하의 명당이 곳곳에 숨어 있다고 전해지고 있으며, 이와 관련 숱한 이야기들이 내려오고 있다. 흥선 대원군은 가야산에 명당이 있다는 것을 알고 지사(地師)와 함께 가야산을 뒤졌다. ‘세도가 김씨네 문 앞에서 옷자락을 끌며 얻어먹는 신세’는 아버지를 명당에 모셔 일거에 운명을 뒤집으려 했다. 이윽고 가야사 경내 석탑 자리가 왕기가 서린 명당이라는 말에 가야사를 불태우고 아버지 이구의 묘를 썼다. 나라를 빼앗기자 자결한 지식인 황현은 ‘매천야록’에서 그 전말을 비교적 상세하게 전하고 있다.


‘흥선군의 아버지 남연군 이구가 죽었다. 그러자 흥선군은 지사에게 명당 자리를 찾아달라 했다. 지사가 가야산 가야사로 데려가 오래된 탑 하나를 가리키며 말했다. “저곳은 큰 길지이니 얼마나 귀하게 될지 모른다.” 흥선군은 가산을 정리하여 이만 냥을 만들었고, 그 절반을 주지에게 주면서 가야사를 불태우게 했다. 그리고 석탑을 깨뜨리고자 도끼질을 했다. 하지만 아무리 내리쳐도 도끼가 튈 뿐이었다. 이에 흥선군이 도끼를 치켜들고 하늘을 향해 크게 꾸짖었다. 그러자 도끼가 말을 들었다. 탑을 해체하고 남연군 시신을 그 밑에 묻었다. 하지만 안심이 되지 않았다. 누군가 몰래 관을 옮겨갈 수도 있었다. 관 위에 수 만 근의 쇳덩이를 녹여 붓고 그 위에 흙을 비벼서 다졌다. 사람들은 남연군의 묘가 복치형(伏雉形 꿩이 엎드려 있는 형국)이라며 감탄했다. 그로부터 14년 후 고종이 태어났다. 천년 사찰을 불태우고 왕이 태어난 것이다. 고종이 왕이 된 후 1866년(고종 3년) 겨울 양구(洋寇I 독일 상인 오페르트 일당)들이 숨어들어와 남연군의 묘를 파헤치려 했다. 하지만 그 속이 딱딱하여 파보지도 못하고 도망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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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제 불교의 푸근한 미소를 찾아 가야산 불교 성지를 복원하려는 불자들의 순례가 수 년째 이어지고 있다.

 


가야산 명당이 왕조의 운명을 좌우했다니 그 속의 백성들이 참으로 작아보인다. 천년고찰 가야사를 없애고 왕기를 흡입했으니 그 왕과 왕조가 흥할 수 없었을 것이다. 가야사 탑 자리가 명당의 운을 다했다면 아직 찾지 못한 대길지가 있다. 바로 자미원(紫微垣)이다. 지구상에 오직 하나 밖에 없는 최대의 명당이며, 72억의 인구를 다스리는 제왕이 이 혈의 발복으로 태어나는 곳이란다. 도사, 술사, 역술가들이 수천 년 동안 뒤졌어도 찾지 못했으니 하늘이 감춰놓았다고 했다. 그 자미원이 바로 내포 가야산에 있다고 전해진다. 천장지비(天藏地秘)의 그곳은 어디일까? 앞으로 지구촌 인구가 72억이 되는 어느 날 과연 그가 나타날 것인가.


서산마애삼존불의 본찰이며 가야산 불국토의 북쪽 거점인 보원사가 다시 일어서고 있다. 뜻있는 이들이 폐사지 귀퉁이를 사들여 절을 짓고 ‘보원사’라 이름붙였다. 그리고 2004년 조계종 수덕사 말사가 되었다. 이 작은 절 보원사(주지 정범 스님)가 하늘만한 불사를 꿈꾸고 있다. 바로 ‘내포 가야산 성역화’이다. 가야산 일대를 불교특구로 만드는 대역사, 그 본부가 바로 보원사이다.


내포 가야산 성역화는 불교가 기복으로 흐르고, 정권에 기대다가 버림을 받고, 불교마저 지역 편중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현실을 안타깝게 여기던 두 스님의 발원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2010년 정권이 종교차별을 하며 불교를 따돌릴 때 정범 스님은 서울 조계사 앞에서 천막을 치고 참회정진기도를 하고 있었다. 그때 조계사 주지였던 토진 스님이 문화결사를 제안하며 ‘내포 가야산 성역화’ 불사 구상을 펼쳐 보였다. 석굴암의 ‘근엄한 미소’에 가장 대칭되는 서산마애불의 ‘푸근한 미소’를 퍼뜨려 작금의 폐해들을 없애고 신도들의 불심을 단단하게 하자는 취지였다. 불교가 외풍을 타지 않으려면 스스로 강해져야 했다.


두 스님의 구상에 공명이 있었다. 스님들과 재가불자들이 속속 동참했다. 추진위원회를 구성하고 2011년 8월 15일 내포가야산 성역화 선포식을 가졌다. 불사의 마지막은 내포가야산을 불교문화특구로 조성하는 것이다. 그 첫 번째 사업이 서산마애삼존불을 문화재가 아닌 살아있는 부처로 모시는 것이었다. 마애불이 서있는 일대를 신행 공간으로 만들어 부처님의 미소(공덕)를 대중에게 나눠주자는 것이었다. 또 하나는 보원사를 복원하는 것이었다. 보원사 복원은 거대사찰의 위용을 그대로 재현하는 것이 아니다. 옛 가람의 모습을 찾을 수도 없지만 또 그대로 지어 놓은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어설픈 불사보다는 차라리 비어있는 폐사지에서 더 많은 것을 볼 수 있게 함이 나을 것이다. 보원사의 복원은 마애불의 미소를 지녔던 백제인들의 넉넉함을 닮으려는 ‘마음 공사’이다. 그래서 내포가야산 성역화 불사가 마무리되었을 때 비로소 보원사의 복원이 완성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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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원사지에 남아있는 당간 지주는 사찰의 규모가 얼마나 웅대했는지를 말해준다.

 


요즘 내포가야산 일대를 돌아보는 불자들의 ‘미소기도행복순례’가 이어지고 있다. 성역화 불사의 첫 결과물이다. 순례단원들은 마애삼존불을 뵙고 보원사로 내려와 당간지주 앞에서 발원하고 5층탑을 탑돌이 한다. 그리고 1000년 비원이 서린 폐사지를 바라보며 기도를 드린다. 이처럼 신성한 경내가 어디 있는가.


“보원사 폐사지는 무상(無常)을 이해하는 최상의 공간입니다.”(보원사 지킴이 김선임 박사)


가피가 있었다. 이제 내포 가야산이 부처님의 나라였다는 사실이 널리 퍼졌다. 또 마애삼존불과 보원사가 단순한 문화재가 아니라 신행공간이 되어가고 있다. 박제된 부처님들이 다시 민중 속으로 내려오고 있음이다. 박물관에 계신 철불도 제 자리로 모시려고 한다. 머잖아 보원사에서 고려 부처님을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


보원사 터는 안온하다. 마애삼존불의 미소처럼 편안하다. 빈 터에 내리는 아침 햇살과 달빛은 색시의 눈물처럼 아름답다. 특히 한 밤에 내려오는 달빛은 특별하다. 달은 당간지주 주변을 저벅거리다 5층탑에 다가가 탑돌이를 한다. 그러면 마애삼존불이 내려와 슬픔을 걷어내고 미소를 흩뿌린다.


옛 보원사 귀퉁이에 새 보원사가 있다. 보원사에서 보원사 빈 터를 바라보면 가슴이 차오른다. 비어서 충만하다. 천년의 미소, 천년의 기도가 고여 있는 보원사.


 

본지 고문 김택근 wtk222@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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