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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00년 불교문화유산, 어떻게 보전 활용할 것인가? -불교포커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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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11-09-08 14:08 조회5,620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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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00년 불교문화유산, 어떻게 보전 활용할 것인가? 한국불교중흥을 위한 8월 대토론회
 
1. 글머리에
한국불교중흥을 위한 대토론회 여덟 번째 주제는 “불교문화유산의 보전과 활용”입니다. 이 주제발표를 조계종 내부의 스님이 아니라 내게 의뢰한 것은 아마도 문화재청장을 지냈기 때문에 무언가 기대되는 부분이 있어서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나는 한사코 이 주제발표를 사양해 왔습니다. 그 이유는 바로 내가 문화재청장을 지냈기 때문에 의견 개진이 자유롭지 못하다는 점입니다. 많은 문제점이 제기될 것이 뻔한데 청장 시절엔 뭘 하고 이제 와서 그런 소리를 하냐고 하면 답변이 궁색하고 길어질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방청, 내지 토론은 몰라도 발표는 무리인 것이죠.
그러나 주최측에서는 편하게 평소 생각만 얘기하면 된다고 하고 특히 불교계를 위한 조언 같은 것이면 좋겠다고 하여 그야말로 평소 생각한 것으로 발표문을 마련했습니다. 그래서 대단히 부실하고 단편적인 내용이 될 수밖에 없었음을 미리 말씀드리며, 관련 자료를 PPT로 준비하지 못한 것에 대해 양해를 구합니다.
불교문화유산의 보전과 활용의 문제에서 우리가 우선적으로 고려해야 할 것은 여기엔 종교적 관점과 문화재적 관점이 동시에 묶여 있다는 점입니다. 국보, 보물을 소장하고 있는 사찰에 대해서는 문화재청에서도 국가적 관리차원에서 보수도 하고, 절집 환경 개선을 위해 당해 사업의 타당성을 고려해 교육관이나 요사채도 새로 지어주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 경우도 공사의 시행은 문화재청에서 하는 것이 아니라 국보의 경우는 경비의 70%까지 국고를 지원해 주고, 사업안이 확정되면 문화재위원회 심의를 거쳐 허가해 줍니다. 문화재청에서 직접 시행하는 일은 다보탑 보수 같은 아주 제한된 일에 국한됩니다. (참고로 문화재청이 직접 관리하는 문화재는 고궁과 왕릉 이외에는 없습니다.)
그 이외의 일, 절집에서 이루어지는 통상적이고 일상적인 일에 대해서는 전적으로 사찰에 맡겨져 있습니다. 무슨 공사를 하는지, 무슨 일로 포클레인이 들어왔는지, 나무를 베어버렸는지 무슨 꽃을 새로 심었는지 일일이 알 수도 없고 이래라 저래라 할 수도 없습니다. 그런데 불교계 내부의 반성과 문제점은 부각되지 않고 대개 문화재 관리 쪽으로 초점이 맞추어지고 있다는 점이었습니다.
두 번째는 역사적 관점과 현재적 관점의 공존입니다. 사찰 입장에서는 문화재청에 대해 반대로 얘기할 수도 있을 겁니다. 법당과 불상들은 문화유산임과 동시에 지금 현재도 진행중인 종교시설이기 때문에 현재의 상황에 맞추어 바꾸어야만 하는 일들이 일어나는데 이것이 문화재라는 이름으로 발목을 잡고 있어 여간 불편하고 비능률적이지 않다는 불만이지요. 심하게 말하면 내 절집을 왜 내 맘대로 하지 못하느냐는 것이고요. 현대적 편의를 왜 이용할 수 없냐는 것입니다. 심한 경우를 보면 어떤 절집은 10여 채의 건물 중 반이 불법건물이기도 합니다.
사실 이 문제에선 못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공공적 성격을 잃지 말아 달라는 일정한 규제입니다. 자기 땅이라도 맘대로 집을 짓지 못하는 것은 민간도 마찬가집니다. 문제는 소유자의 재력과 안목, 그리고 그 시대 문화능력일 것입니다.
세 번째는 문화유산은 크게 유형유산과 무형유산으로 나뉩니다. 그런데 우리는 대개 유형유산에 국한해서 이 문제를 논하곤 합니다. 어떤 면에서는 불교문화유산의 높은 정신적, 인문적 가치를 어떻게 구현해야 할 것인가가 더 큰 과제일 수 있습니다. 또 불교문화유산이란 꼭 국보, 보물 등 문화재를 보유하고 있는 사찰에 대한 것만이 아니라 이 시대에 세워진 사찰의 건축과 조각과 회화와 공예가 100년, 200년 뒤에는 문화재로 될 수 있는 것인데, 이런 인식이 종단과 스님들 내부에서는 어떻게 받아들여지고 있느냐는 문제도 나옵니다.
이런 문제의식을 갖고 저는 먼저 우리 불교문화유산이 1700년 동안 어떻게 창조되어 왔고, 어떻게 파괴되었으며, 어떻게 변질되었는지를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2. 한국 불교문화의 역사적 흐름
1) 삼국부터 고려까지
고구려 소수림왕 2년(372) 불교가 이 땅에 전래된 이래 아주 서서히 민중의 마음속에 퍼져갑니다. 그러다 100년이 지나 500년 무렵이 되면 삼국은 불교에 힘입어 고대국가로서 완벽한 틀을 갖추게 됩니다.
영국의 문명사가인 케네스 클라크는 고대국가로 발전하기 위한 3대 요소로 첫째 강력한 율령체제, 둘째 영토의 확장, 셋째 종교를 꼽았습니다. 여기서 종교는 절대자를 모시는 신앙행위이면서 동시에 그 발달된 신앙체계가 곧 국가를 운영하는 이데올로기로서 중요한 기능을 갖고 있었다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잘 이해되지 않는 현대인에게 자신이 권할 수 있는 방법은 당시엔 매스컴이 없었다는 사실을 기억하라고 했습니다. 그 결과 모든 민족은 고대 중세를 거치면서 자기들의 민족종교나 민속적인 샤머니즘을 버리고 발달된 종교에 이데올로기를 의지하게 되어 서양은 기독교, 동양은 불교로 귀착되었다고 했습니다.
이리하여 불교는 500년을 넘어서면서 마침내 삼국시대 미술사를 고분미술에서 불교미술로 전환시킵니다. 지하의 왕을 위해 거대한 고분을 만들고 금관을 부장하던 그 정성이 부처님을 모시는 사찰과 사리함으로 옮겨집니다. 경주 황룡사, 익산 미륵사 같은 대찰이 세워지고 금동미륵반가사유상 같은 불상의 명작들이 모셔지며 왕흥사, 미륵사, 왕궁리탑에서 출토된 사리함 같은 위대한 불교공예품이 만들어졌습니다.
통일신라로 들어가면 전국민의 9할이 불교를 믿게 되고 경주 시내는 ‘사사성장 탑탑안행(寺寺星張 塔塔雁行)’의 스카이라인을 갖게 되었다고 합니다. 부석사, 화엄사, 해인사 같은 화엄십찰이 세워지고 불국사, 석굴암, 에밀레종 같은 불멸의 불교문화유산이 탄생했습니다.
9세기 중엽, 하대신라로 들어서면 도의선사가 들여온 선종은 마침내 심심산골까지 파고들어 구산선문을 형성합니다. 여기서 우리나라의 독특한 산사의 전통이 확립됩니다. 그리고 경주 남산을 비롯하여 전국의 명산에 마애불이 조성됩니다. 산사와 마애불은 우리 국토의 상징적 표정이자 역사적 인문적 경관으로 되었습니다.
불교문화는 고려왕조에도 그대로 이어져 어느 산골에 가도 사찰이 있었습니다. 요즘 교회당만큼 전국에 퍼져갔다고 할까요. 국난을 이기기 위해 팔만대장경을 제작하였고, 말할 수 없이 아름다운 고려불화들이 제작되었습니다. 그렇게 창출된 불교문화유산의 양이 얼마인지 가늠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고려의 멸망과 함께 1천년간 이어진 불교문화의 전통은 여기서 일단 막을 내리고 말게 됩니다.
2) 조선왕조
1392년 개국한 조선왕조는 주도적 이데올로기를 불교에서 성리학으로 일대 전환시켰습니다. 동시에 강력하고도 무자비한 폐불정책으로 사찰과 불교문화유산은 철저하게 파괴됩니다. 승려는 천민으로 전락되고, 사찰은 몰수되며, 파불이 자행됩니다. 분황사 우물에서 수습된 불두와 머리를 잃은 불상들은 이 처절한 상황을 잘 말해줍니다. 풍기 숙수사는 소수서원이 차지했고, 한강변 동호나루터의 비구니 사찰은 독서당으로 쓰이며, 추풍령 황간의 언덕받이 절집에는 가학루라는 정자가 세워집니다.
이런 파괴와 학대 속에 삼국과 고려의 불교문화유산은 거의 다 멸실되어 버렸습니다. 이데올로기의 전환에 따른 앞 시대 문화유산의 안타까운 상실이었습니다. 불행히도 당시엔 그것을 문화재로 인식하지 못했습니다. 오직 화강암만이 살아남아 석불, 석탑, 석등, 사리탑, 그리고 폐사지의 주춧돌만이 그 옛날을 증언하는 상징적 유물로 되었습니다.
그러나 1천년을 이어온 불교의 무형유산, 즉 그 정신과 전통은 탄압으로 사라지지는 않았습니다. 불교는 위축되었을지언정 여전히 민중들의 마음속에 자리잡아 숨죽이고 있었습니다. 어쩌다 왕실에서 세조, 문정왕후 같은 이가 현실적인 필요로 불교를 비호할 때는 어둠속의 촛불처럼 반짝 빛을 보였습니다. 낙산사, 봉선사, 봉은사가 이 때 중창되었고 <도갑사 32응신도> 같은 명작도 제작되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아주 단발적인 부흥이었습니다.
그러다 임진왜란이라는 국난을 겪으면서 불교는 다시 부활합니다. 임진ㆍ병자 양란 이후 전국에 사찰이 중창됩니다. 그런 면에서 서산 대사, 사명당은 조선불교의 중창조였습니다. 법주사 팔상전, 화엄사 각황전, 금산사 미륵전, 무량사 극락전 등 웬만한 재력으로는 불가능한 거대한 중층 불전들이 세워집니다. 전국에서 불사들이 일어납니다. 민간은 현세의 구복과 내세의 구원을 위해 다시 사찰을 찾아옵니다. 엄청난 크기의 괘불이 조성되어 야단법석을 장식합니다.
조선후기는 더 이상 유교국가가 아니었습니다. 국가 운영의 이데올로기는 여전히 성리학이었지만 민간신앙으로서 불교와 공존하는 이중체제였습니다. 연담 백파 초의 등 고승들이 배출되었습니다. 국가도 이런 추세를 거스르지 못하여 정조는 용주사를 세우고 부모은중경을 간행했습니다.
현재 우리가 보고 있는 사찰들의 가람배치는 이 때 재편성되면서 산지중정형으로 틀을 갖추게 됩니다. 이는 향교, 서원과 마찬가지로 미음(ㅁ)자 구조를 기본으로 하면서 양 날개를 다는 형식입니다. 불교 형식이 유교 형식으로 들어갔다가 그것이 다시 불교 형식에 반영되면서 우리의 전통 건축 형식으로 자리매김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나라의 독특한 산사의 미학이 이루어집니다.
자연과 조응하는 절집, 이 절집 건축으로 인하여 또 다른 인문적 표정을 갖는 산천의 경관이 탄생합니다. 어느 산에 가든 가장 좋은 자리에 절집이 들어서 있는 것을 보면서 누구든 경탄해 마지않는 산사의 전통은 불교문화유산의 가장 큰 자산입니다.
거기에 민중적 형식도 들어옵니다. 지난 200년간 억불정책 속에서 민간이 의지한 산신령, 칠성님을 불교가 적극 끌어안아 사찰 한쪽에 칠성각, 산신각이 들어섭니다. 마을의 지킴이인 장승이 사찰의 지킴이로 받아들여져 실상사, 불회사, 관룡사 등의 돌장승들이 말해주듯 사찰장승으로 수용됩니다. 불교의 포용력과 흡합력이 여실히 나타납니다.
조선왕조의 말기, 민란이 일어나고, 서학이 들어오고, 동학이 일어날 때 민간신앙으로서 미륵신앙도 일어나 수많은 민불이 조성됩니다. 조선후기 국가운영은 유교를 주도적 이데올로기로 하였지만, 민간의 마음속에 자리잡은 신앙은 불교였습니다.
3) 일제강점기 이후
조선후기에 불교가 이처럼 다시 일어났지만 당시엔 이를 이끌어가는 종단은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때문에 파벌도 없었습니다. 파벌이란 힘이 있을 때 생기는 부작용입니다. 조선 후기엔 불교의 탄압도 없었지만 지원이나 대접도 없었습니다. 일제강점기로 들어서면서 일제는 우리 문화를 말살시키는 작업의 일환으로 조선불교를 일본 임제종에 편입시키려는 시도가 있었습니다. 조선불교가 위기를 맞은 것입니다.
그러나 이 위기가 기회였습니다. 탄압을 이기기 위해 불교계는 단결을 하게 되었습니다. 만해 스님 등이 조선불교를 이끌어갈 종단을 탄생시킨 것입니다. 결국 1911년 일제는 사찰령으로 30본산제도를 인정하고, 1924년엔 31본산 체제가 확립됩니다. 그런 억압된 상황에서 그나마 다행인 것은 일제가 강제로 실시한 토지조사 때 불교는 기존의 사찰과 산문이 소유한 토지를 대장에 올려놓아 대찰의 경우 수십 만, 수백 만 평을 소유하게 된 것입니다. 그것은 오늘날 조계종의 거대한 인프라가 되었습니다.
해방 후 불교는 다시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해방 이전의 석전, 한영, 경허, 만공, 한암 스님의 맥을 이어 효봉, 동산, 금오, 구산, 청담, 성철 등 대선사가 이끌어갔습니다. 한국전쟁으로 월정사, 낙산사를 비롯한 수많은 사찰들이 불타버리고 맙니다. 정치가 개입되면서 조계종과 태고종의 마찰이 일어났고 또 몇 차례 법란이 일어나는 진통과 아픔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조계사, 수덕사, 백양사, 해인사, 통도사 등의 조계총림, 덕숭총림, 고불총림, 해인총림, 영축총림 등 5대 총림에서 학승ㆍ선승들이 배출되면서 꾸준히 발전합니다. 그 분들이 오늘의 우리 불교계를 이끌어가고 있습니다.
대중의 불교 인식이 전에 없이 확대되고 높아지게 되었고 민주화 과정에 불교계도 동참함으로써 사회적 발언과 영향력에도 무게가 실리고 있습니다. 이제 불교는 또 다시 전성기를 맞이할 수 있는 역량을 갖추게 되었습니다. 그 시점에서 이와 같은 대토론회가 이루어지고 있는 것으로 저는 이해하고 있습니다.

3. 불교문화유산의 보전 문제

1) 사찰건축과 중창불사

불교문화유산 중 우리에게 가장 크게 다가오는 것은 사찰건축입니다. 이것을 잘 보존하는 것은 사찰과 종단뿐만 아니라 문화재 전반의 중요과제입니다. 문화재로 지정된 오래된 목조, 석조 건축은 특히 문화재 당국이 세심히 신경 써야 할 문제입니다. 그러나 절집 자체를 어떤 모습으로 가꾸는가는 사찰을 지키는 승려의 문제입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 우리는 솔직히 반성하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이 시대의 중창불사 문제입니다.
1980년대에 들어올 때까지 조계종 사찰의 재정은 열악했습니다. 국민소득이 100불도 안 되던 60년대, 500불도 안 되던 70년대, 겨우 1000불 시대로 들어선 70년대의 경우 사찰의 재정은 빈약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80년대초까지 이런 상황은 계속됩니다.
1985년 화재를 입어 삼층목탑을 소실한 쌍봉사는 당시 비구니 스님 두 분이 지키고 있었습니다. 이 분들은 화순군의 극빈자로 등록되어 있었습니다. 초파일 행사를 위해 스님들이 시주를 구하러 나가 절집을 비운 사이 일어난 화재였습니다.
이런 상황이 1980년대 후반으로 들어서면서 달라지게 됩니다. 사찰에 다시 사람들이 모여들었고 대시주도 등장하면서 대대적인 불사가 일어나게 됩니다. 이 때 불교는 새롭게 단장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는데 오히려 많은 것을 잃었습니다. 위기의 시절은 기회로 되었는데, 이 좋은 중흥의 기회가 불교문화재, 그 중 사찰건축에 치명적인 변질과 상처를 입히게 됩니다.
송광사, 수덕사 등 대찰부터 거대한 중창불사가 이루어졌습니다. 그러나 불행히도 이 때 중창불사의 방향을 설정하고, 현대 사찰의 새로운 미학을 이끌어갈 스님이나 건축가가 없었습니다.
중창불사에는 포클레인이라는 중장비가 사용됨으로써 삽시간에 형질이 변경되어 연병장을 연상케 하는 이유없이 넓은 절 마당이 생깁니다. 그 동안 가난하게 살아온 것이 한이라도 된 듯, 화려하고 부티 내려는 중창불사는 우리 산사의 미학을 완전히 일그러트려 버렸습니다. 대찰의 경우는 대중을 맞이하기 위한 변형이었다 치더라도 아기자기한 산사의 아담한 절마당이 허전하기 그지없는 밋밋한 넓은 마당으로 변한 것에는 허망함조차 일어납니다.
절집의 진입로도 큰 상처를 입었습니다. 산사의 건축은 진입로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산사의 진입로는 세속과 성역을 시간적, 공간적으로 가르는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선암사, 송광사, 해인사, 백양사 등 고찰의 진입로는 건물보다도 우리의 마음을 풍요롭게 해줍니다. 이것이 현대적 편의라는 이유로 길을 넓게 닦고, 주차장을 바짝 당겨 마련한 것은 산사의 미학을 일그러트려 놓는 일이었습니다. 그 점에 대해서는 행정 당국과 종단, 그리고 스님들 모두의 반성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2) 자재와 재료의 문제
중창이든 복원이든 이 시대 문화재 건축에서 가장 큰 문제로 되는 것은 기술도 기술이지만 자재와 재료의 문제입니다. 새로 짓는 건물, 복원한 건물이 예스러움을 담아내지 못하고 생경스럽게 느껴지는 것은 이 때문입니다. 이것은 불교계의 문제가 아니라 문화재 관리의 문제라는 면이 더 큽니다.
목조건축의 자재는 나무, 그 중에서도 소나무, 소나무 중에서도 춘양목이라는 금강송이 가장 좋은데, 지금 사용되는 것은 대개 캐나다 수입목인 더글라서퍼(Douglas-Fir)라는 소나무입니다. 이건 질감이 매끄럽기만 하고 우리 전통 목조건축의 깊은 질감을 주지 못합니다.
단청도 기술의 문제보다는 재료의 문제가 더 심각합니다. 지금 재료로는 단청이 아니라 페인트칠을 한 듯한 이질감이 생깁니다. 단청 중에 고색단청이라고 해서 옛 멋이 나게 하는 기법이 있지만 인건비가 배로 들어가기 때문에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기와도 마대로 찍어낸 무늬가 없이 일률적으로 똑같은 KS기와를 사용하면 마치 플라스틱 기와를 얹은 것처럼 밋밋합니다. 근래에 기와를 새로 개발하여 회색, 쥐색, 검정색 등 다양하고 크기도 건물에 맞게 대ㆍ중ㆍ소로 나누어 구별되며 질감도 나타낸 것이 생산되고 있습니다. 기존 기와보다 30% 정도 비쌉니다. 비싸도 이걸 사용하면 어느 정도 문제는 해결되는데 절집에서 기와불사를 받는 걸 보면 이 문화재복원용 기와가 아니라 저렴한 것을 사용하니 개선되지가 않습니다.
주춧돌, 계단돌, 장대석 등 화강암 석자재에서도 마감을 기계로 하기 때문에 정으로 다듬은 손맛, 즉 텍스쳐(texture)를 느낄 수 없습니다. 이 또한 경비의 문제입니다.
불상의 개금 문제에 이르면 아주 심각합니다. 지금 개금한 불상은 한결같이 번쩍번쩍합니다. 화려한 것이 아니라 번잡스러울 정도입니다. 재료의 문제도 있지만 그런 번들거리는 개금에 스님들이 별로 거부감을 갖고 있지 않다는 점이 참 기이합니다.
9세기 하대신라는 철불의 시대였습니다. 장흥 보림사, 철원 도피안사의 철조비로자나불상이 그 대표적인 예이죠. 이 불상들이 아스콘으로 덮여 있고, 요란한 금칠로 되어 있었습니다. 문화재청에서 이 불상들을 원대복귀시켰습니다. 그리고 철불로 그 모습을 드러내자 우리의 눈을 의심할 정도로 거룩하고 존엄한 불상의 모습을 띄고 있습니다.
박완서 선생이 생전에 도피안사 철불을 보시고 나서 철불의 장엄함에 감동하여 보림사도 다녀오셔서 제게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자신은 가톨릭 신자이지만 이 철불에서 받은 절대자의 이미지를 잊을 수 없다면서 그런데 왜 요즘 불상엔 그런 마티엘(matiere)이 살아 있는 불상이 없냐고 꾸지람을 곁들여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불국사 금동아미타여래좌상과 금동비로자나불좌상은 8세기 3/4분기 통일신라 경덕왕 때의 명작입니다. 그러나 불교조각사 책에 이 불상이 잘 나오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잘못된 개금 때문에 불상의 이미지가 천해 보이기 때문입니다. 천박한 도금은 부처님을 욕되게 하는 것임을 우리 모두가 깊이 반성해야 할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이런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까요. 멋있게, 최선을 다해서 짓는 것이 아니라 주어진 예산에서 경비를 절감하며 짓는 것을 우선적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항시 그 결과는 불만족스러울 수밖에 없습니다. 이는 마음과 자세의 문제입니다.
이런 점을 생각할 때 절집 조경을 어떻게 꾸려갈 것인가라는 문제도 생각해 볼 만합니다. 근래에 우리 나무, 우리 꽃을 찾는 국민적 열망이 보입니다. 국적없는 조경, 특히 일본 정원의 무의식적 답습을 넘어서 우리 산사에 걸맞는 조경을 만들어내는 것이 절집 보존에 큰 역할을 할 것입니다. 순천 선암사, 서산 개심사에서 그 좋은 예를 구할 수 있습니다마는, 조경은 절집의 위치와 식생에 따라 다를 수밖에 없고 또 나무의 성장을 염두에 두는 장기적인 플랜에 입각해야 하는 것이기 때문에 아주 어려운 문제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문제는 절집에서 사는 사람들이 한층 마음을 쓰지 않으면 안 되는 대단히 중요한 과제입니다.
3) 폐사지 복원의 문제
다음은 폐사지 문제에 대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삼국, 통일신라, 고려로 이어온 1천년 불교문화가 조선왕조에 이데올로기 전환으로 핍박받으면서 한반도 심신산골까지 있던 크고 작은 사찰들이 속속 폐사되었습니다. 그 폐사지의 수가 얼마나 되는지조차 정밀히 조사된 것이 없을 정도입니다. 이는 불교를 위해서나 문화유산을 위해서나 크나 큰 손실이었습니다.
폐사지의 복원에 대해서는 불교계와 문화재 관계자들의 의견에 큰 차이를 보이고 있습니다. 대체로 불교계는 복원을, 문화재 학자들은 현상 보존을 주장하고 있습니다. 이 문제는 아주 신중하고 깊이 있는 판단을 요구합니다.
원칙으로 따지자면 사라진 문화유산을 다시 복원하는 것은 후손된 자들의 임무입니다. 그리고 동시에 폐사지는 그 자체로 문화유적으로서 역사적 가치와 문화재적 의의를 잃지는 않습니다. 로마와 아테네의 무너진 신전들이 보여주는 역사적 경관을 연상할 수도 있습니다.
때문에 중요한 역사성을 지니고 있거나 뛰어난 석조문화재를 갖고 있는 경우는 문화재 당국의 보호를 받고 있습니다. 여주 고달사터, 원주 거돈사터, 보령 성주사터, 서산 보원사터, 합천 영암사터, 양양 진전사터, 양양 선림원터, 강릉 굴산사터, 산청 단속사터 등이 그 대표적인 예입니다.
이 절터에 다시 사찰이 복원되는 것이 옳으냐, 그대로 보존하는 것이 옳으냐를 판단하는 것은 결코 쉬운 결정이 아닙니다. 현재로선 폐사지를 보존하면서 인근에 새 절집이 들어서는 방향에서 일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그 중 항시 복원문제가 대두되는 것은 경주의 황룡사와 부여의 정림사 문제입니다. 이에 대해서는 문화재 관련 학자들도 찬반 양론으로 갈려 있습니다. 찬성하는 견해는 고도 보존이라는 역사성의 복원을 말합니다. 사실 경주에 불국사마저 복원되지 않았다면 우리는 통일신라의 불교적 분위기를 체감하기 힘들었을 것입니다. 백제의 고도인 부여가 허망하게 보여지는 것은 정림사 같은 시내에 있는 사찰이 폐허로 남아 있어 더욱 패망한 나라의 이미지가 강하게 들어오기 때문입니다.
저는 부여 정림사 복원을 찬성하는 쪽입니다. 백제역사재현단지에 능사를 복원하느니 그 예산의 반 정도면 가능했던 정림사를 복원하는 것이 옳았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복원된 정림사는 문화재관리인이 아니라 스님들이 상주하면서 살아있는 사찰로 운영되는 것이 마땅하다는 생각입니다.
하지만 황룡사의 경우는 약간 다릅니다. 신라의 상징적 사찰인 황룡사를 복원하면 그 위용은 대단할 것입니다. 2만 5천평 대지에 소요 예산도 약 3천5백 억원이 듭니다. 그러나 우리 국가 예산이 1년에 300조를 넘어섰고, 7개년 계획이면 1년에 500억만 투입하면 가능하기 때문에 예산의 문제는 아닙니다.
반대하는 쪽은 상상복원이 가져오는 문제점을 들곤 합니다. 그러나 사실 복원 형태를 예측하기 힘들어서라기보다 이를 복원할 수 있는 문화능력을 의심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난 몇 십년간 복원이라고 한 것이 황당무계하게 나타나 폐허가 전해주던 역사적 상상력마저 잃어버린 것을 많이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진흥왕이 터를 닦고, 선덕여왕이 구층탑을 세울 때처럼 종교하는 마음, 나라를 구하는 마음으로 복원하는 문화창조의 자세가 지금 이 시대에는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지금 복원한다면 아마도 이 엄청난 예산을 감안할 때 턴키 시스템에 의해 재벌 건설회사들이 달려들 것입니다. 그들은 문화재 복원, 거룩한 신전이라는 정신보다 3천5백억원짜리 건물 공사에 마음을 둘 것입니다. 이런 상태에서는 차라리 후손들이 복원할 수 있게 미루는 것이 마땅합니다. 더욱이 황룡사를 짓는데 필요한 목재를 산출해 보니 150년 이상 된 금강송이 4t 트럭으로 2천5백 대분이 요구됩니다. 이 모든 조건이 갖추어진다면 종교, 문화재, 토목, 건축 등 관계분야에서 이 시대 문화역량을 모아 추진할 수 있다고 봅니다. 그 시점이 언제일지는 저도 모르겠습니다.
4) 보호각과 산성비의 문제
불교계에서는 아직 심각하게 생각하고 있지 않은 것 같지만 문화재 관리에서 큰 문제로 골머리를 앓고 있는 것의 하나로 산성비에 의한 석조문화재의 손상입니다. 산성비 문제가 대두된 지 약 40년이 되었습니다. 그 전에는 없었던지, 몰랐던지 둘 중 하나입니다. 그러나 지금 산성비에 노출된 비석 받침대의 돌거북 등판이 벗겨져 나가는 현상을 보고 있습니다. 석탑, 사리탑 등도 이런 산성비 피해를 입고 있는 것이 틀림없습니다.
무생물의 병리적 현상은 다 망가진 다음에야 그 징후가 나타납니다. 언젠가는 심각하게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날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를 막기 위해 그 많은 석조문화재에 보호각을 세울 수는 없는 일입니다. 불국사 석가탑에 보호각이 세워졌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입니다. 지금 원각사 10층석탑을 투명보호각에 가두어 놓은 것이 옳은 일이라고 생각하는 이도 드뭅니다.
또 보호각이 능사만은 아닙니다. 이태영 박사는 오히려 보호각을 세우는 것은 석조문화재의 수명을 단축하는 지름길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태양열 중에는 자외선과 적외선이 있는데 자외선이 석조문화재의 보존에 필수적인 영양소인 바 그것을 차단하는 행위라는 것입니다. 또 통풍의 문제도 동반됩니다.
경주 골굴암의 마애여래좌상을 아크릴 판으로 보호각을 만든 것이나, 서산 마애불에서 보호각을 철거한 것은 우리가 석조문화재 보존에서 의례적으로 생각하는 보호각 건물로는 보존이 제대로 되지 않거나 반대로 손상될 수 있다는 점을 말해줍니다.
이 점은 문화재 관리 담당자들이 더 연구 개발할 문제입니다마는, 사찰에 상주하며 이를 지켜보고 관리하는 스님들도 숙지하고 있어야 할 것으로 생각됩니다.
5) 우리시대 전통을 위하여
문화유산에는 시대양식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한편으로는 전통양식을 계승하면서 한편으로는 그 시대 양식을 창조하여 그것이 나중에는 하나의 전통이 됨으로써, 전통은 개조되면서 더 두꺼운 내용을 간직하게 됩니다. 통일신라, 고려, 조선시대로 이어져온 사찰건축에 20세기, 21세기의 새로운 전통이이 이 시대에 창출되었는가라는 문제입니다.
법당, 불상, 석탑, 석등, 불화 등이 당대적 예술역량의 도움을 받지 못하고 상투적으로, 그래서 조악한 매너리즘을 답습하고 있을 뿐인 듯합니다. 이 시대를 대표하는 유명한 화가, 건축가, 조각가들이 이 시대 불교문화 창출에 등장하지 못했다는 것은 큰 손실입니다. 그런 면에서 서울 길상사에 조각가 최종태 선생의 석조보살상이 세워진 것, 마곡사의 전통불교문화원을 건축가 승효상이 설계한 것, 건축가 김개천의 󰡔명묵의 건축󰡕 같은 것을 저는 아주 의미있게 생각합니다.
21세기 들어서면서 모든 상황이 달라졌습니다. 나라의 경제력도 커지고, 민도도 높아지고, 스님들의 안목도 넓어지고, 민간의 요구도 세련되어가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이런 문화능력에 맞는 불교문화유산을 창출해내야 합니다. 지금 같아서는 백년, 2백년 뒤 한국불교미술사를 말할 때 과연 20세기, 21세기의 불교미술을 어떻게 말할지 안타깝습니다.

4. 불교문화유산의 활용 문제
1) 성보박물관의 과제
불교문화유산 중 동산문화재의 관리와 활용을 말하자면 우선 유명 사찰에 있는 성보박물관의 운영을 들 수 있습니다. 사찰에 소장된 유물들이 그 자체로 문화재인 것이 많고 또 도난이 빈번하게 일어나면서 성보박물관을 세운 것은 우리 불교계가 근래에 이룩한 하나의 성과입니다.
그러나 성보박물관이 여기 저기 생겨나고 마치 성보박물관을 갖고 있느냐 아니냐에 따라 명찰이냐 아니냐를 가름하는 기류가 생기면서 이상한 분위기로 흐르고 있습니다. 성보박물관을 세워 놓고 사찰 고유의 역사성과 문화유산을 전시를 통해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마치 교육관처럼 빈약한 전시물을 판넬과 모형으로 대치하여 내용을 채우는 경우도 많게 되었습니다. 이래서는 성보박물관의 질을 저하시키는 것밖에 안 됩니다. 본사 중심으로 또는 소장 유물이 많은 사찰 몇 곳에 집중해서 운영하는 것이 바람직한 일입니다.
현재 성보박물관의 참 기능을 가장 잘 보여주고 있는 것은 통도사 성보박물관이며, 그 다음으로 직지사 성보박물관이 뒤를 잇고 있습니다. 모름지기 박물관이라면 유물을 전시하고 보호하는 것만으로 그칠 일이 아닙니다. 박물관의 구성요소를 보면 1.유물, 2.건물, 3.사람, 4.재정입니다. 그런데 건물과 유물의 중요성은 인식하면서 사람과 재정의 중요성에 대해서는 깊은 이해가 부족한 것 같습니다. 박물관 활동이 있으려면 사람과 재정이 필수입니다. 사람을 키우십시오. 성보박물관이 기획전을 하고 심포지움을 열고 대중강연회를 갖고 연구활동을 할 수 있게 재정을 넉넉히 지원해주십시오. 다른 공사비에 비하면 얼마 되지도 않는 수치입니다. 그렇게 할 때 불교문화유산은 제 빛을 발하게 되고 문화유산을 통하여 대중이 불교에 더 가깝게 다가가며 불교가 우리의 역사와 현재적 삶에서 갖는 가치를 널리 인식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게 됩니다. 그것이 박물관의 일입니다.
몇 해 전에 비로소 한국불교역사문화기념관이 조계사 경내에 만들어졌습니다. 그리고 이 건물 안에 조계종 불교중앙박물관이 세워져 해마다 많은 의미있는 기획전을 비롯하여 여러 가지 뮤지움 액티비티(museum activity)가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이런 박물관 활동이 전국의 성보박물관으로 확대될 수 있도록 종단 안의 어르신과 종단 행정 관계자들이 마음쓰기를 바랍니다.
바람직한 박물관 운영을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사람에 많은 투자를 해야 합니다. 안목있는 스님이 관장을 맡고 전문적인 학예원을 배치하여야 합니다. 대부분의 성보박물관은 관리인, 관리직 수준이라는 점에서 성보박물관의 전망은 아주 회의적입니다.
재정의 문제에 있어서도 전향적인 사고가 필요합니다. 외국의 예를 보면 재단을 만들어 재원을 마련하기도 합니다마는 대개는 민간의 도네이션(donation)에 의지하는 것이 보통입니다. 부처님에게 바치는 시주도 일종의 도네이션이라고 본다면 성보박물관을 위한 대시주를 어떻게 확보하느냐가 이 문제의 열쇠가 될 수 있습니다. 사찰에 시주하는 것과 별도로 성보박물관에 시주하도록 유도하여 재정을 확보하는 것도 한 방법이 될 것입니다.
2) 템플스테이와 걷기 문화
근래에 일어난 템플스테이는 불교문화유산 활용에서 획기적인 성과라고 생각합니다. 이 템플스테이를 얼마만큼 발전시키느냐에 따라 불교의 대중적 확산이 크게 이루어질 가능성이 열려 있습니다. 아직 어느 사찰의 템플스테이 프로그램이 잘 짜여졌는지 알지 못합니다마는 서로가 경험을 공유하여 이 시대의 훌륭한 불교문화 대중화 형식으로 뿌리내리고 퍼져가기를 바랍니다. 이 문제는 제가 전공이 아닌지라 무어라 말씀드릴 내용이 없습니다. 그러나 템플스테이를 통해 불교문화의 새로운 콘텐츠 개발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절감했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현대사회가 디지털화 되어갈수록 아날로그를 그리워하면서 그 아날로그 문화의 한 단면을 체험하고 싶어 하는 대중적 욕구가 그렇게 나타난 것이겠지요.
요즘 세간에서 제주 올레를 비롯하여 전국에 둘레길이 생겨난 것은 템플스테이와 맥을 같이하는 면이 있습니다. 올레길, 둘레길의 대중적 선호도를 불교계에서 깊이 연구하여 제시할 수 있는 것이 있을 것 같습니다. 제주 올래길은 우리 시대의 대단한 여행문화 혁명입니다. 스페인의 <산티아고 가는 길>을 벤치마크하여 제주의 아름다운 자연을 만끽하고 맘껏 걷고픈 현대인의 욕구를 충족시켜준 것이죠.
이 제주 올레길과 각 지방의 둘레길을 <산티아고 가는 길>과 비교할 때 큰 차이는 인문정신과 역사에 대한 동기부여가 적다는 점입니다. <산티아고 가는 길>은 자연풍광 뿐만 아니라 ‘성지순례’와 ‘스페인의 역사와 예술’이라는 두 장르를 아우릅니다. 세스 노터봄은 이렇게 말합니다. “산티아고 순례길은 예수의 12사도 중 야곱을 위해 지어진 대성당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를 종착역으로 해요. 1000년 전에는 가톨릭 신자들이 걷다가 험난한 자연과 싸우면서 집으로 돌아오지 못하기도 했죠. 그런데 이제 현대인들은 종교적인 이유가 아니라 성취감을 얻기 위해 도전합니다. 자신과의 싸움, 자신을 증명하는 일이 된 거죠.”
한때 한국관광공사와 경주시에서 원효의 길을 기획하여 경주에서 당진을 오가는 원대한 구상을 발표한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가 참고할 만한 것은 일본에 있는 하이쿠[俳句]의 시인 마츠오 바쇼(松尾芭蕉, 1644~1694)의 길입니다. 바쇼가 걷던 400년 된 길로 1천 km에 달하며 곳곳에 그의 하이쿠를 새긴 비가 세워져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 길의 상당부분이 아스팔트길로 되어 있어서 <산티아고 가는 길> 같은 명성은 얻지 못하고 있습니다. 요는 억지로 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죠. 자연과 역사와 문화와 인문정신이 자연스럽게 어우러지면서 연륜이 생겨야 하는 것이죠.
이런 순례의 길을 불교계에서 깊이 연구하여 새로운 프로그램으로 만들어낼 수는 없을까요. 이를테면 <남도의 산사 순례>같은 것입니다. 거기에는 지리산자락, 섬진강변의 아름다운 풍광이 있고 보림사, 쌍봉사, 연곡사, 태안사, 화엄사, 천은사, 실상사의 아름다운 팔각당 사리탑이 있고, 운주사와 불회사가 갈라지는 삼거리에는 중장터라는 내력도 있고, 천관산과 보성만의 풍광 송광사에서 굴목이재 너머 선암사로 가는 산길도 있습니다. 일주일이고 열흘이고 이 땅에 선종이 뿌리내리던 시절을 생각하며 남도의 봄을 즐길 수 있는 길을 스님들의 길로 엮어주시면 우선 나부터 따라가 보고 싶어집니다.
이런 불교문화 콘텐츠 개발을 어디서 하든, 누가 하든 불교계가 적극 지원해주셨으면 합니다. 이렇게 된다면 지자체가 관광 차원에서 하는 것과는 차원이 다를 수 있고 또 큰 호응이 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불교계가 안 하면 내가 몇 해 뒤 정년퇴직하고 나서 해볼 생각도 있습니다. 불교계가 먼저 해 주십시오.
3) 불교의 사회적 참여방식
불교문화유산의 활용은 불교의 사회적 참여와 연관하여 생각할 수 있는 과제들도 많을 것으로 보입니다. 민주화 과정에서 불교계가 보여준 투쟁, 인권과 환경문제에서 불교계가 마음 쓰고 있는 부분들은 불교가 국민적 신뢰를 얻는 중요한 사회참여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와 아울러 불교가 사회 참여하는 방식에 불교 그 자체로 이룩할 수 있는 부분도 없지 않을 것입니다. 한 예를 들겠습니다.
독도 문제가 지금 국가적 현안으로 되어 있습니다. 제가 문화재청장으로 재직하고 있었을 때인 2004년에 시마네현에서 독도를 일본 영토로 선언하는 일이 있었습니다. 이 때 정부에선 아주 난처한 입장에 빠졌습니다. 현 차원에서 일어난 일에 대통령이나 외교부장관이 나설 일이 아니었고, 그렇다고 울릉군수나 경북지사가 국가나 정부를 대리하여 대처할 일도 아니었습니다. 더욱이 국제적 분쟁을 일으키려는 일본의 속셈에 끌려들지 않기 위해 우리는 이른바 무대응에 가까운 ‘조용한 외교’ 방침을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이에 NSC(국가안전보장회의)에서는 국제적 분쟁을 보이지 않는 한에서 실효적 지배권을 행사하자는 결론을 내었고, 독도의 행정적 관리자로 입도허가권을 갖고 있는 문화재청장에게 독도를 개방하도록 하였습니다. 그 때 다음 번에 또 일본이 독도를 문제 삼고 나오면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해 히든카드로 준비한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독도에 암자를 하나 지어 스님을 상주시키는 것이었습니다. 당시 지관 총무원장도 이에 동의하여 암자 이름을 ‘동해암’이라고 하나 ‘무무암’이라고 하나 의견을 나눈 일도 있었습니다. 승효상 건축가가 설계한 시안도 있습니다.
독도가 이렇게 문제되고 있을 때 종단에서는 독도에 암자를 짓겠다는 신청을 정부에 낼 만합니다. 정부가 나서서 암자를 지으면 외교적으로 문제가 되겠지만 종단의 요구를 민원으로 처리한다면 사정이 달라집니다.
이것은 한 예를 말씀드린 것입니다만, 이런 식으로 불교 자체로 사회와 국가에 참여하며 불교의 위상과 역할을 높이는 것도 불교문화유산의 적극적 활용에 해당한다고 봅니다.

5. 현대사회의 인문정신을 위하여

1) 불교와 인문정신의 발현

유형적인 문화재인 법당과 탑파의 복원보다 절실히 요구되는 것은 인문학으로서의 불교를 대중적 언어로 말하는 것입니다. 포교는 부처님 말씀을 전파하는 것만으로 그 임무를 다할 수 없습니다. 현실적인 고뇌를 불교적 사고로 풀어갈 수 있는 방안까지 제시해야 합니다.
요즘 우리 사회엔 인문학이 붐입니다. 아니 희망의 인문학을 얘기하고 있습니다. 이젠 기술만으로는 한계가 있음을 절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인문학은 인간의 가치를 찾아내는 일이고, 종교는 기본적으로 인문학입니다.
템플스테이가 갖는 의미는 디지털 시대에 아날로그 중에서도 아날로그인 불교의 근원적 성찰을 그리워하며 거기에서 잃어버린 정신적 빈칸을 메우려는 것입니다.
시대의 문제는 고전에 답이 다 들어 있습니다. 그래서 고전을 새롭게 해석하면서 그 길을 찾으려고 하는 것이죠. 불경 같은 위대한 고전이 또 있을까요. 그 답을 찾아 헤매는 중생들에게 스님들은 친절하면서도 진중한 답을 말해줄 수 있어야 이 시대 불교문화가 일어납니다. 그래야 다시 중흥합니다. 김난도의 󰡔아프니까 청춘이다󰡕, 박경철의 󰡔동행󰡕이 왜 베스트셀러가 되었는가, 그 속에서 해답의 실마리를 얻을 수 있을 것 같아서 독자들은 거기에 매달립니다. 그런 실증적이고, 구체적이고, 희망적인 이야기를 불교의 언어로, 불교적 사고로, 불경의 예증으로 말해주는 책이 나오기 바랍니다. 그건 스님 세계에서만 할 수 있습니다.
예전에 법정 스님의 󰡔무소유󰡕가 있었는데 그 이후 그런 결과물이 불교계에선 나오지 않았습니다. 법정 스님의 절판시키라는 단호한 유언은 다른 스님들이 󰡔무소유󰡕를 뛰어넘는 모습을 보이라는 준엄한 할(喝)로 받아들일 일입니다.
2) 한국불교 사상의 뿌리를 밝히는 노력
끝으로 한 마디 덧붙이겠습니다. 조선 불교의 뿌리를 끊임없이 탐구하고 발굴하고 정리하는 사업이 범불교적 차원에서 대대적이고 지속적으로 이루어져야 합니다.
아직도 우리 불교계에선 고승이라면 달마, 혜능, 마조, 임제 같은 스님을 먼저 떠올리고 그 분들의 법어 속에서 참을 구합니다. 아주 중요한 일입니다. 그러나 우리나라 역대 고승의 사상과 실천 속에서 그것을 찾는 작업도 병행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1960년대에 철학을 공부한다면 칸트, 헤겔, 쇼펜하우어 같은 분을 연구하는 것이고 동양철학은 공자, 맹자를 연구하는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근래에 와서는 퇴계, 율곡을 연구하는 것을 철학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사람이 없습니다.
불교도 먼 나라 이방인 말씀에서 떠나 이 땅에서 이루어진 일과 언어에도 깊이 들어가야 합니다. 원효대사의 󰡔대승기신론󰡕, 의상대사의 <법성게> 그리고 대각국사 의천과 보조국사 지눌의 사상이 한국인의 마음속에 들어앉게 하는 작업이 필요합니다. 한 사람의 승려로서 아름다운 모습을 보여주었던 지증 대사, 무염 화상, 구국에 나선 청허 대사, 사명당, 호연지기를 보여준 진묵 대사, 불교의 실학적 실천을 보여준 초의 스님…. 이런 분들의 일대기를 대중이 가슴에 담을 수 있도록 하는 작업이 나와야 합니다.
권상로, 이기영 같은 재가 학자들의 성취에 비견되는 업적들이 조계종 안에서 나올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 학승이 절실히 요구됩니다. 이런 차원에서 지관 스님의 󰡔가산불교대사림󰡕이라는 불교사전 편찬에 존경을 표합니다. 이런 작업과 병행해서 옛 스님들의 인간적 면모도 살려내야 불교계가 존경받습니다. 이를 위해서는 자료를 집대성하는 작업을 꾸준히 해야 합니다. 예를 들어 조선 후기 동계 조귀명의 󰡔동계집󰡕은 당신이 스님들과 주고받은 편지만으로 한 권의 책을 채우고 있습니다. 이런 묻혀 있는 불교관계 인문 자료들을 마치 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 거대한 프로젝트로 시행하듯 조계종에서 발굴, 정리하는 일을 진행해야 합니다. 그 결과물은 몇 십 년 뒤에 결실을 볼 것이니 지금 당장 시작해야 합니다.
중창불사에 마음 쓰는 만큼 인재를 키우고, 불교의 인문정신을 발굴하고, 연구하고, 대중을 교화하는데 마음 써야 합니다. 옛날에 산문에 박혀 있던 지증대사는 어느날 한 지게꾼이 “먼저 깨달은 사람이 나중 사람에게 배운 것을 나누어주는데 인색해서는 안 된다.”는 말에 느낀 바가 있어서 대중교화에 나서게 되었다고 합니다. 나누어 주십시오.

6. 맺음말
불교문화유산의 보전과 활용에 대해 평소 생각했던 문제점과 그 원론적 해결 방법을 말씀드렸습니다마는 결국 가장 중요한 것은 불교문화를 이끌어가고 그 현장에 살면서 지키고 있는 스님들의 안목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습니다.
문화재청장 시절에 내가 많이 듣던 얘기 중 하나가 어느 절에 갔더니 사찰 분위기 다 망치는 공사가 한창 진행 중인데 청에서는 뭘 하고 있냐는 질타였습니다. 왜 그것을 해당 종단이나 사찰에 직접 항의하지 않고 문화재청에 하였을까요? 불교문화유산 보전의 일차적 책임은 분명 스님들 자신에게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들의 항의는 스님들의 안목을 믿지 못하는 것의 다른 표현일 뿐입니다.
승가학교의 커리큘럼에서 불교문화유산을 미술사적 관점에서 어떻게 보고 있는가를 심도 있게 가르치며 안목을 키우는 일에 더욱 많은 배려가 있어야 될 줄로 압니다. 안목은 어느날 갑자기 키워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절집에 사는 스님들은 자신들이 일상속에서 행하는 작은 행위 하나가 사실은 불교문화유산 보전과 활용의 일부분으로 나타난다는 주체의식과 주인의식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새로 지은 식당과 게스트 하우스는 물론이고 법당 뒤켠에 자연스럽게 나서 자라는 야생 나무 한 그루와 당신이 무심코 화단에 옮겨 심은 꽃 한 송이가 절집을 찾는 대중들에게는 하나의 문화유산적 가치로 다가온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주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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